ClariS are Clara & Karen!
1. 5월 1일 – 자카르타로 떠나다
클라리스가 2017년의 싱가포르에 이은 7년만의 해외 라이브 소식을 발표했다. 공연 일정은 5월 5일, 장소는 자카르타 컨벤션 센터였다. 필자는 예전부터 인도네시아를 한번 가보고 싶었다. 10년 전에 베트남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정말 좋았던 영향인 것 같다. 그때부터 동남아시아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기회가 된다면 여행을 떠나보고 싶었다. 인도네시아는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굉장히 높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언제나 1순위로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필자는 자유 여행을 선호한다. 올해 2월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일주일 정도 간 적이 있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갔던 패키지 여행이었기 때문에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일본이 아닌 나라로 혼자 자유 여행을 떠나는 건 의외로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분명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자카르타와 한국의 시차는 2시간으로, 한국보다 왼쪽에 있는 자카르타는 한국보다 2시간이 느리다. 가령 한국이 오후 1시라고 하면 자카르타는 오전 11시인 것이다.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자카르타라고 말하는 이유는 인도네시아에 세 가지의 시간대가 있기 때문이다. 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 서부 표준시에 해당된다. 자바 섬에 적용되는 인도네시아 서부 표준시(UTC+7) 말고도 인도네시아 중앙 표준시(UTC+8)와 인도네시아 동부 표준시(UTC+9)가 있다. 이 중에서 인도네시아 동부 표준시는 한국의 시간대와 동일하다.
7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수카르노 하타 공항(Soekarno–Hatta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다. 공항의 이름은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와 초대 부통령 하타의 이름을 합쳐서 지어졌다고 한다. 잘 알려진 케네디 공항이나 존 레논 공항처럼 해외에는 이렇게 인명을 포함한 공항이 종종 있는 것 같다. 수카르노 하타 공항은 자카르타 도심에서 서쪽으로 약 25km 떨어져 있다.
인도네시아에 도착하면 먼저 도착비자(VOA, Visa on Arrival)를 구입해야 한다. 한국인은 인도네시아를 방문할 때 특별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30일까지는 여행 비자가 나오지만, 그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전자 도착비자(e-VOA)를 미리 신청한다면 절차를 간단히 줄일 수도 있다. 비행기에서 느긋하게 내렸더니 도착비자 줄이 상당히 길어져서 40분 정도 줄을 섰던 것 같다.
도착비자를 사기 위해서는 35달러 혹은 500000루피아(한화로 약 42440원)를 지불해야 한다. 이때 달러로 냈다고 해도 거스름돈은 루피아로 준다.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로도 결제가 가능하나 수수료가 부과된다. 원화나 다른 화폐로도 된다고는 들었지만, 환율이 이상하게 적용되어 손해를 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도착비자 발급 제도는 인도네시아의 관광 및 경제 회복을 위해서 2022년 3월부터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도착비자를 구입하고 나면 출입국 사무소에서 정말 간단한 입국심사를 받는다. 그 다음에는 위탁 수하물을 찾고 온라인(https://ecd.beacukai.go.id)으로 미리 등록해둔 세관신고서의 QR코드를 직원에게 보여준다. 모든 입국 절차는 이로서 끝나게 되고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다. 여행 중에는 반드시 현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곧바로 공항에 있는 ATM기에서 현금을 인출했다. BNI라는 은행의 ATM에서 뽑았는데, 트래블월렛을 가지고 있다면 BNI나 BCA 은행의 ATM을 이용하기를 권장한다. 다른 은행의 ATM에서 시도하면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늦은 밤이기도 해서 그랩(Grab)으로 택시를 잡아 숙소로 이동했다. 그랩은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되는 택시 및 음식 배달 앱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만든 경쟁 업체 고젝(Gojek)도 그랩과 완전히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자카르타에서는 그랩이 고젝보다 저렴하다길래 필자는 그랩만 가입하고 계속 그랩만 썼다. 전화번호 인증과 카드 등록은 되도록 한국에서 미리 하고 오기를 바란다.
공항 내 각 청사 간의 이동은 무료 셔틀버스나 스카이 트레인을 이용하면 편리하게 가능하다. 자카르타는 공항철도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시내로 들어간다면 공항철도를 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공항까지 연결하는 셔틀버스를 제공하는 호텔도 있다.
그런데 배차된 그랩 차량을 기다리는 와중에 민간 택시 기사들이 엄청나게 말을 건다. 심한 경우에는 자신이 그랩 기사인 척을 하기도 한다.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차 번호와 기사의 얼굴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예전에는 그랩이나 고젝은 공항에서 픽업이 불가능하고 하차만 가능했지만 요즘은 픽업도 가능하게 바뀌었다. 다만 공항에서 그랩이나 고젝으로 택시를 잡을 경우에는 상당한 추가 요금이 발생한다. 그래서 블루버드(Bluebird) 택시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블루버드 택시는 항상 미터기를 키고 가기 때문에 흥정이 필요없고 사기가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항 밖에는 그랩, 고젝, 블루버드 정류장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픽업 대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정류장에서 대기해야 한다.
첫날 묵을 숙소만 돈을 아끼기 위해 공항 근처로 잡았다. 이때는 아직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그랩 택시에 추가 요금이 생긴다는 걸 몰랐다. 거리가 4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택시비가 200000루피아(한화로 약 16980원)나 되는 걸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2. 5월 2일 – 코타 투아 & 모나스
필자는 본래 성격 자체가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타입은 아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도 사전에 어디를 가면 좋을지 정도만 정하고, 동선이나 일정은 가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럼에도 여행의 테마와 나름의 목표는 있었다. 그건 바로 “클라리스와 향신료”였다. 최근 발매된 클라리스의 28번째 싱글 타이틀 곡 〈アンダンテ〉와 〈늑대와 향신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모두 알다시피 클라라는 스위츠를 좋아하고 카렌은 동물을 좋아한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먹는 걸 정말 좋아한다. 마침 자카르타에는 “바타비아 카페(Batavia Cafe)”라는 예쁜 카페가 있고, 인도네시아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동물들이 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는 예전부터 향신료 무역을 해왔으며 육두구, 정향 등 다양한 향신료의 원산지로 유명하다. 덕분에 인도네시아는 음식이 맛있기로 통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뭔가 벌써부터 아귀가 잘 맞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클라리스와 향신료”라는 테마에 맞춰서 평소에는 잘 안 가는 카페에도 가보고, 가까이서 동물들을 접하는 시간을 실컷 가지고, 인도네시아만의 매력이 가득 담긴 향신료와 음식을 마음껏 즐기기로 다짐했다. 게다가 카렌의 가입 10주년이 되는 2024년은 용의 해가 아닌가?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용이 살고 있는 나라이다. 코모도 왕도마뱀은 영어로는 “Komodo Dragon”이라고 불린다. 인도네시아에서만 서식하는 코모도 왕도마뱀을 꼭 만나고 싶었다. 앞으로의 여정에는 ‘향신료’와 ‘용’이라는 특별함이 생겼다.
지금까지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저 다른 사람들이 많이 간다는 이유로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여행은 만족도가 떨어졌다.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적인 여행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보고르 식물원(Bogor Botanical Gardens)과 안쫄 유원지(Ancol Dreamland)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KFC에서는 더블 다운 김치(Double Down Kimchi)라는 특이한 메뉴를 판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꼭 먹어보고 싶었다. 가족들이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곽튜브”에서 소개된 바가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판매가 종료된 것 같았다.
오전 중에 체크아웃을 하고 자카르타 시내의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서 그랩을 불렀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자카르타에는 극심한 대기 오염과 교통 체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된 “차량 홀짝제”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홀수 날짜에는 뒷번호가 홀수인 차량, 짝수 날짜에는 뒷번호가 짝수인 차량만 운행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다만 자동차만 해당되는 것인지 오토바이는 홀짝 상관없이 운행되고 있었다. 차량 홀짝제는 2018년의 아시안 게임을 대비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랩의 시스템 상 짝수 날임에도 홀수 차 번호 기사들이 배차를 잡을 수 있었다. 운이 안 좋아서일까 기사들은 나에게 “지금 가는 중입니다”라는 채팅을 보내고서 오지 않기를 반복했다. 여러 번 기다리고 취소하길 반복하다가 결국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택시를 탈 수 있었다. 밖에 서있을 때 주변을 지나가던 민간 택시 기사들이 자꾸 호객 행위를 하는데 가격을 말도 안되게 후려쳐서 깜짝 놀랐다. 20km 거리를 500000루피아(한화로 약 42500원)에 부르다니.. 이건 평범한 가격의 10배에 달하는 범죄 수준이다. 호텔로 가는 길에 번역기를 사용하여 그랩 기사님께 물어보니 이런 일들은 자주 있다고 답하셨다. 참고로 그랩은 기본적으로 선결제 시스템이지만, 배차가 취소되는 경우에는 15분 정도 지나면 자동으로 환불이 이루어진다.
이번 여행은 “ibis Styles Jakarta Tanah Abang”이라는 호텔과 함께 했다. 체크인 시간이 14시부터였기 때문에, 호텔에 짐을 맡기고 나서 행사가 열리게 될 자카르타 컨벤션 센터를 미리 방문했다. 이때부터는 캐리어를 맡겼으니 오토바이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오토바이는 살면서 거의 탈 일이 없어서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는데, 인도네시아 여행이 끝날 때까지 20번은 넘게 탄 것 같다. 자카르타는 날씨가 워낙 덥기도 하고 보행자도가 없는 경우가 정말 많기 때문에 도보로 이동하기가 어렵다. 웬만하면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편이 좋다. 오토바이 택시는 차량 택시에 비해서 가격도 저렴하고 배차도 더 잘 되고 길이 막히면 훨씬 더 빠르게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자카르타 컨벤션 센터에서 열리는 행사의 이름은 “Anime Festival Asia Indonesia 2024″이었다. 9년 전부터 팬이었지만 클라리스의 단독 라이브나 발매 기념 이벤트를 제외한 행사를 보러 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 자신이 외국인 팬이기도 하고, 일본이 아닌 해외라는 점도 있었기에 더욱 기대를 품고 있었다. 목요일에는 아직 부스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여서 내부까지는 입장할 수 없고 사진 촬영도 금지였다.
외부만 간단히 둘러보고 난 뒤 근처에 있는 스나얀 시티(Senayan City)라는 쇼핑몰을 구경했다. 인도네시아의 쇼핑몰에서는 입장 시 반드시 보안검색대로 소지품을 검사한다. 유럽의 박물관이나 성당을 입장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쇼핑몰은 기온이 30도가 넘는 밖과는 다르게 매우 시원하고 쾌적하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에서 쇼핑몰은 냉방과 치안이 제공되므로 시민들의 복합적인 생활 및 문화 공간으로서 기능한다고 한다. 딱히 쇼핑을 할 생각이 없더라도 한번쯤 구경해보길 권한다. 그러고 보니 스나얀 시티 입구에 달린 전광판에는 손흥민이 모델로 쓰인 광고가 게재되어 있었다.
아시아나 항공의 기내식은 충분히 맛있었지만 인도네시아의 현지 요리가 정말 먹고 싶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기에 스나얀 시티의 푸드 코트에 위치한 전통 인도네시아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바로 인도네시아와 사랑에 빠질 정도로 음식의 퀄리티가 엄청났다. 역시 사람이 많고 비싼 가게는 실패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의 음식점을 가면 어딜 가나 “Ayam”이라는 글자가 많이 보인다. 닭고기라는 뜻이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는 그랩 오토바이를 타고 파타힐라 광장(Fatahillah Square)에 도착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구시가지 코타 투아(Kota Tua)의 중심지가 바로 파타힐라 광장이다. 코타 투아는 말 그대로 옛 도시라는 뜻이다.
코타 투아와 파타힐라 광장은 자카르타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다. 위치는 자카르타 시내에서 조금만 위로 이동하면 된다. 광장 주위로는 자카르타 역사 박물관, 인도네시아 은행 박물관, 도자기 예술 박물관, 꼭두각시(와양) 박물관, 우체국 등이 있다. 코타 투아에서 오른쪽 위로 이동하면 안쫄 유원지가 나온다.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고 있던 도중 어떤 현지인이 말을 걸었다. Daniel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파타힐라 광장에서 유명한 건축가이자 교수였다. 40년 전 뉴질랜드에서 유학하며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Daniel은 영어가 유창했으며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도 가능했다. 심지어 한국의 군포와 부산에서 산 적도 있었고 한국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왔던 내가 현지인과 4시간 동안 영어로 대화하면서 이 광장을 돌아보게 될 줄은 몰랐다. 첫날부터 이런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Daniel은 친절하게도 나에게 파타힐라 광장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인도네시아라는 나라가 만들어지기 이전, 7세기부터 16세기까지 자바 섬에는 순다 왕국이 세워져 있었다(669년 ~ 1579년).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은 유럽의 선두주자로서 동방 항해로를 개척하여, 1513년에는 4대의 함선이 순다 끌라빠 항구(Sunda Kelapa Harbour)로 들어온다. 순다 끌라빠 항구는 “후추 항구”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순다 왕국은 후추 독점권을 지키기 위해서 힘이 필요했다. 더욱이 인접한 중부 자바의 이슬람 세력인 드막 술탄국(Sultanate of Demak)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해야 했다. 그렇게 1522년에 포르투갈과 순다 왕국은 우호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은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초의 국제 조약이었다.
포르투갈은 후추 무역에 대해 무관세 특혜를 받고, 반대로 찔리웅 강(Ciliwung River)에 방어 요새를 지어 외세로부터 순다 왕국을 보호해주기로 한다. 그러나 치르본(Cirebon) 왕국의 군대가 쳐들어와 포르투갈을 상대로 2번의 큰 승리를 거둔다. 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던 장군의 이름은 파타힐라였다. 함락된 순다 끌라빠에는 그에 의해 ‘완벽한 승리’를 의미하는 자야카르타(Jayakarta)라는 새로운 이름이 지어졌다. 파타힐라는 훗날 광장의 이름이 되었으며 자카르타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술탄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1602년을 기점으로 인도네시아는 오랜 기간 동안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340년 동안이나 네덜란드의 통치를 받았는데, 네덜란드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면서 향신료 무역의 독점을 노렸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네덜란드와 영국 간의 세력 각축의 결과 일시적으로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2년부터 3년 간 이어진 일본군의 지배를 마지막으로 인도네시아는 1945년 8월 17일에 독립을 선언했다. 겉보기에 그저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구시가지의 이면에는 사실 오랜 기간에 걸친 아픔의 역사가 서려있다.
광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웅장한 흰색 건물은 자카르타 역사 박물관이다. 지금은 역사 박물관이 되어 식민지 시절의 역사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지만, 과거 바타비아 시청이었던 이 건물은 수탈과 지배를 위해 존재했다. 그래서 깃발 윗 부분 외벽에는 네덜란드어로 총독부(Gouverneurs Kantoor)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런 건물을 일부러 철거하지 않고 역사 박물관으로 탈바꿈시킨 인도네시아인들의 태도로부터 배울 점이 느껴진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에 있어 지대한 공로를 세운 얀 피테르존 코엔(Jan Pieterszoon Coen)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동인도회사의 현지 총독으로 부임하여 Jayakarta를 Batavia로 개명하고 본격적으로 네덜란드 양식의 무역도시를 건설했다. Daniel의 말에 의하면 코엔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인도네시아의 시민들로부터 75 ~ 80%에 달하는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반역 행위가 발각되었을 경우에는 감옥으로 보내졌다. 시청 광장에서는 바타비아 시민들 앞에서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시청 근처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감옥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교통 체증으로 유명한 자카르타지만 코타 투아는 전혀 그렇지 않다. 광장 내에서는 차량과 오토바이의 이용이 제한되는 대신에 온텔 자전거(Onthel Bike)를 대여할 수 있다. 온텔 자전거는 1970년대에 인도네시아에서 흔하게 사용되었던 앤티크한 자전거 모델이다. 이곳의 자전거들은 다채로운 색을 자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색깔을 빌려 타는 것이 가능하다. 다음에 다시 방문할 때에는 반드시 분홍색과 초록색 자전거를 대여해야겠다.
운하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예쁜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Daniel 말로는 원래 구불구불한 강을 네덜란드가 향신료 무역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척 사업을 하여 곧게 만들었다고 한다. 운하 너머로 보이는 건물 하나하나에는 저마다의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어떤 건물은 과거 이 운하를 지나는 배가 싣고 있던 향신료에 세금을 매기는 건물이었고, 그 옆에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 세워진 극장이 있었다. 잡초로 가득했던 한 건물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돕기 위해 활동했던 한 독일인의 약국이었다. 안타깝게도 네덜란드 정부의 미움을 산 독일인은 추방되고 말았다고 한다. 제일 신기했던 건 운하 위에 설치되어 있던 수상 택시 정거장 건설에 Daniel이 참여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 말고도 그는 자카르타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나 빈부격차 문제에 대해 자세한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예쁜 건물들만 있던 건 아니었다. 우리가 걷고 있던 쪽에는 지붕이 날아가버린 열악한 환경의 건물이 보였다. 영국 통치 시절에 만들어진 건물인데, 일본군이 점령했던 시기에 폭탄을 맞아서 지붕이 없어졌다고 Daniel은 설명했다. 그 안에는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는 직접 나를 데리고 가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코타 투아의 끝에는 코타 인탄 다리(Jembatan Kota Intan)라고 불리는 도개교가 놓여 있다. 1628년 지어진 인도네시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운하에 선박이 지나가면 개폐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지금도 잘 작동되고 있다.
길을 건너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수천명이 살고 있는 빈민가를 마주하게 된다. 지붕 없는 집에 이어서 여기도 Daniel과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 솔직히 여기서 본 풍경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세금 징수원들이 찾아 오면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조차 쫓겨나는 일이 있다고 한다.
Daniel은 은퇴 시기를 넘긴 나이임에도 열정적으로 바타비아를 위한 자선 활동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의 다양한 활동 중 하나는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무상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학교의 시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나란한 철길의 사이에서 골판지와 매트를 깔고 칠판을 세워서 강의를 해왔다고 한다. 정말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다.
그의 꿈은 이 광장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강 위에 수상 택시를 운영하고, 파묻혀 있는 철길을 들어올려 트램을 운행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또한 국제 기관의 지원을 받아내는 것에 성공하여 조만간 빈곤층들을 위한 아파트가 지어질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Daniel은 현지인 맛집이라며 “Kedai Seni Djakarte”라는 카페를 가보라는 말을 남겼다. 가격, 디자인, 맛, 서비스, 분위기가 모두 사랑스러운 이 카페는 역사 박물관 바로 옆 길에 위치해 있다. 바타비아 카페만 가보지 말고 Kedai Seni Djakarte도 가보길 추천한다.
코타 투아는 자카르타의 찬란하고도 아픈 역사가 깃든 공간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가 어쨌건 간에 지금은 그저 행복이 넘치는 공간일 뿐이다. 사람들에 의해 바타비아의 역사는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파타힐라 광장에는 유명한 관광지인 바타비아 카페가 있다. 바타비아 카페는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역사적 명소이다. 원래는 카페가 아니라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이었던 1830년대에 지어져서 네덜란드인들의 숙소 및 창고로 사용되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1930년대를 테마로 한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로 아름답게 꾸몄으며, 세계 100대 카페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클라라와 카렌이 뭔가 들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정말로 멤버들은 공연 다음 날 코타 투아와 바타비아 카페를 방문했다. 앞서서 성지순례를 하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앞서 언급했듯 바타비아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자카르타의 이름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군대가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Djakarta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뀌었고, 그 후 인도네시아어 철자가 바뀌면서 오늘날의 Jakarta가 되었다.
바타비아 카페에서는 음료만 마실 생각이었지만, Daniel과 오랫동안 같이 다니다 보니 어느덧 저녁시간이 되어 식사 메뉴도 주문했다. 담배를 안 피운다고 하니 자리는 2층을 배정받았다. 카페의 1층은 흡연 구역이고 2층은 금연 구역이다. 2층은 금연 좌석이면서 경치를 보기에도 더 좋다. 1층에는 카페와 라운지가 있어서 가끔 라이브 연주 무대가 펼쳐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시간이 늦어 커피를 마시기는 좀 애매하다고 느껴서 마실 것으로는 코코넛 워터를 주문했다. CNN 선정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1위를 차지했던 그 유명한 른당(Rendang)과 태어나 한번도 먹어본 적 없는 카사바 튀김에 도전했다. 른당은 소고기 안심을 향신료와 함께 볶은 후 코코넛 밀크에 졸여서 만드는 음식이다. 그래서 향은 전혀 다르지만 식감은 장조림이랑 비슷했다. 카사바 튀김은 입에 맞지 않아 별로 먹지 않았는데, 직원이 나에게 영어로 치워드려도 괜찮냐고 물어본 뒤 깔끔하게 포장해주었다. 가격이 비싼 만큼 서비스도 좋고 분위기도 좋은 카페였다.
파타힐라 광장에서의 기묘한 관광을 마치고 모나스(Monas)를 보러 갔다. 모나스는 132m의 거대한 탑으로 자카르타 시내 중앙 한복판에 있는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이다. 모나스는 “Monumen Nasional”, 즉 ‘국립기념탑’이라는 뜻이며,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정부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저항과 투쟁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 시절 1961년부터 1975년까지 공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탑의 아래는 박물관이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다. 내부 박물관 입장료는 5000루피아(한화로 약 420원), 전망대 입장료는 15000루피아(한화로 약 1270원)이다.
모나스는 독립과 자유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는 명소이다. 필자는 자유의 가치를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걸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군대에 있었을 때가 떠오르기도 했고 현재 삶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다. 드넓은 광장에는 많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관광지란 반드시 이색적인 무언가나 흥미로운 액티비티를 제공하는 장소만은 아닌 것 같다.
자카르타에는 트랜스 자카르타(TransJakarta)라는 독특한 대중교통이 존재한다. 전용 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버스지만 승강장은 철도처럼 되어 있다. 지하철 이용 방식과 완전히 동일하게, 들어갈 때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고 나올 때도 같은 방식으로 찍으면 된다. 버스 안에서는 따로 교통카드를 찍지 않는다. 내부는 굉장히 시원하고 공간이 넓으며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아 쾌적했다. 버스에는 앞문과 뒷문이 있는데 각각의 문 앞에는 보안 요원이 한명씩 대기하고 있다. 문이 두 개라고 해서 한국처럼 앞문으로 타고 뒷문으로 내리는 시스템은 아니다.
3. 5월 3일 – 라구난 동물원 & 따만 미니
자카르타 여행 계획을 세우던 중, 어떤 인도네시아 팬분께서 라구난 동물원(Ragunan Zoo)을 가보라고 추천해주셨다. 이왕 추천을 받았기도 했고 동물원은 어렸을 때 이후로 가본 기억이 없어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카렌은 동물을 정말 좋아하니까 자카르타에 오면 라구난 동물원이나 따만 사파리(Taman Safari)를 구경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번 자카르타 여행의 테마는 “클라리스와 향신료”였다. 라구난 동물원에 가기로 한 선택은 전적으로 옳았다.
라구난 동물원은 자카르타 남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출입구가 4개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정말 크다. 입장료는 35000루피아(한화로 약 2970원)였다. 거대한 동물원 안을 효율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호랑이 열차를 탈 수도 있고, 자전거를 대여하는 방법도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걷는 걸 좋아해서 그냥 걸어다녔다. 운영 시간은 07:00 ~ 16:00이며 월요일은 정기휴무일이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코모도 왕도마뱀은 라구난 동물원, 코모도 박물관(Komodo Museum), 따만 사파리에서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참고로 코모도 박물관은 따만 미니(Taman Mini) 내부에 있다.
여유롭게 전부 한 바퀴를 도는 데는 4시간 정도가 걸렸다. 날씨가 덥기 때문에 수분 보충은 필수다. 곳곳에 놓인 자판기에서는 안타깝게도 현금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동물원 안에는 물과 음료수를 파는 상인들이 많이 있고 식수대도 잘 되어 있다. 또한 자카르타에서는 어딜 가나 쓰레기통이나 화장실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여행 중 정말 좋았다고 느꼈던 점 중 하나였다.
동물원 중앙으로 오면 둥근 호수가 보인다. 호수 근처에는 코끼리, 코모도 왕도마뱀, 오랑우탄(Orangutan)을 본뜬 조각상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오랑우탄은 본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보르네오섬과 수마트라섬에만 분포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말레이어 “Orang Hutan”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하는데, ‘오랑’은 사람, ‘우탄’은 숲이라는 뜻이다.
동물원 내부에는 전체의 1/4 정도 되는 공간에 영장류 전문 동물원 “Schmutzer Primate Center”가 따로 만들어져 있다. 입장을 위해서는 별도로 25000루피아(한화로 약 2120원)를 지불해야 하며, 먹을 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므로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받는다. 영장류 센터의 마스코트는 단연 고릴라라고 할 수 있다. 타일 바닥, 식수대, 현수막, 안내판, 조각상 등등 어딜 가나 고릴라가 보인다.
카렌은 작년에 한 FM 라디오에서 자신의 최애(推し)는 고릴라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고릴라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 적이 있었다(2023년 12월 20일, TOKYO FM AuDee 飯田里穂の推し活推進部). 필자는 카렌의 영향을 받아 그 이후로 줄곧 고릴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카렌이 말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카렌이 고릴라와 사랑에 빠지게 된 건 4~5살 때의 일이었다.
- 서부로랜드고릴라의 혈액형에는 B형밖에 없다.
- 머리카락이 긴 건 강함의 상징이다.
- 고릴라가 가슴을 치는 행위는 드러밍(Drumming)이라고 불린다.
- 드러밍은 주먹을 쥐고 하는 게 아니라 손을 편 채로 하는 것이다.
- (“드러밍이라는 말은 모두들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라는 카렌의 말을 들은 MC의 츳코미😹)
- 고릴라는 동물원에 자주 있는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동물이다.
- 일본의 동물원에 있는 건 대부분 서부로랜드고릴라이다.
- 마운틴고릴라는 멸종 위기에 놓여있다.
고릴라의 식사가 예정되어 있던 시간은 정오였지만 실제로는 조금 이르게 간식을 먹고 있었다. 친절하게 고릴라가 있는 곳을 알려주신 스태프분 덕에 고릴라가 식사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릴라는 큰 소리에 민감하다고 하는데, 고릴라를 좋아하는 카렌도 그렇다. 게다가 고릴라와 카렌은 모두 먹는 것을 좋아한다. 역시 고릴라에 〈ふぉりら〉 해버린 카렌인걸까? 그건 그렇고 단지 고릴라를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역시 클라리스는 여행에 향신료를 더해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늦은 이날의 점심 식사는 동물원 내부의 로컬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자세한 메뉴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해물이 들어간 나시 고렝(Nasi Goreng)과 염소 고기를 넣은 소또(Soto)를 주문했다. ‘나시’는 인도네시아어로 쌀이고 ‘고렝’은 볶음이라는 뜻이다. 소또는 고기나 채소 육수를 넣어 맑게 끓이는 인도네시아 전통 국물 요리이다. 가격도 괜찮고 맛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동물원 내에 있다 보니 벌레가 많이 날아다녔다. 식사를 하는 내내 테이블 근처에서 똥파리 10마리가 누가 누가 잘 나는가 경쟁을 하고 있었다. 쓰고 있던 모자로 20분 동안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면 정신이 붕괴되었을지도 모른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서 오후 3시 정도에 라구난 동물원에서 퇴장했다. 라구난 동물원과 따만 미니는 둘 다 자카르타 시내에서 조금 아래로 떨어져 있다. 시내에서 따로 이동하는 것에 비하면 좌우로 조금만 이동하면 되기 때문에 하루에 묶어서 가는게 이득이다. 따만 미니로 가는 도중 비가 내려서 그랩 기사님과 함께 잠시 멈춰 우비를 입고 이동했다. 이때 처음 안 사실인데, 그랩 오토바이의 좌석을 열면 그 속에 우비가 들어 있다.
따만 미니는 인도네시아의 민속촌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그야말로 인도네시아 34개주 각 지방의 의식주와 문화를 총망라한 테마파크다.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로 가득하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학생들의 견학 장소로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1970년대 초 수카르노 대통령의 부인인 이부 틴 수하르토(Ibu Tien Seoharto) 여사의 제안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입장료는 인당 20000루피아(한화로 약 1700원), 개장 시간은 07:00 ~ 22:00이다. 안에 있는 건물들의 운영 시간은 대부분 16:00이나 18:00까지로 상이하다. 박물관이나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따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따만 미니의 면적은 무려 147ha로, 그렇게 컸던 라구난 동물원(140ha)보다도 조금 더 크다. 규모가 거대한 만큼 전부 걷기는 어려울 수 있으니 안에서는 케이블카나 트램을 이용하면 편리하게 돌아볼 수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전시관에서는 설명이 인도네시아어로만 적혀 있었고, 영어 번역본은 없거나 QR코드를 찍어야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굳이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주로 밖을 돌아다니면서 구경했다. 확실히 인도네시아의 여러 문화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따만 미니 중앙에 조성된 큰 인공 호수는 인도네시아의 지도 모양을 한 섬들로 수놓아져 있다. 아이디어가 참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 낮이어서 그런지 예상과 다르게 정말 사람이 없었다. 그 와중에 코모도 박물관에는 사람이 많았다. 여기는 일단 코모도 왕도마뱀처럼 생긴 건물이 가진 인상이 아주 강하다. 그리고 코모도 왕도마뱀 둘이 껴안고 있는 듯한 조각상이 눈에 띄는데, 실제로는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코모도 박물관은 입장료 25000루피아(한화로 약 2120원)를 별도로 받는다.
코모도 박물관 외에는 별다른 내부 관람을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자카르타에는 두리안 거리가 있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예전에 베트남에 갔을 때 ‘과일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망고스틴을 정말 맛있게 먹었던 추억이 있어서, ‘과일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두리안의 맛이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두리안 거리는 칼리바타 영웅 묘지(Kalibata Heroes Cemetery)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근처 역의 이름에는 두리안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Stasiun Duren Kalibata).
두리안의 가격은 하나에 11000루피아(한화로 약 9330원)였다. 직원이 두리안 하나를 칼로 열더니 나에게 맛을 보게 했다. 그리고 나서 본인도 같이 맛을 보더니 이건 별로라며 던져버리고 맛있는 녀석이 나올 때까지 두 개를 더 깠다. 확실히 품질은 보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엄청난 악취가 난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처음에는 생각보다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야외였기도 했고 근처 도로의 매연 냄새와 섞이면서 잘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가게 테이블에 앉아서 먹었는데, 혹시라도 다 먹지 못하면 곤란해지니 이날 저녁은 일부러 먹지 않았다. 두리안은 과육 한 덩어리마다 호두만한 크기의 씨가 여러 개 박혀 있기 때문에 본래 크기에 비해서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두리안을 먹으면서 두리안에 대해 검색을 좀 해봤다. 두리안의 이름은 말레이어로 ‘뾰족한 가시’를 뜻하는 “Duri”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솔직히 엄청 맛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식감은 부드러운 크림 같은 느낌이었고 달다기보다는 고소한 맛이었다. 두리안의 냄새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표현하자면, 구토와 썩은 마늘을 잘 섞어서 나흘 정도 방치한 느낌이었다.
4. 5월 4일 – 따만 사파리
따만 사파리는 자카르타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보고르(Bogor)에 위치해 있다. 워낙 규모가 크기도 하고 기상 악화나 교통 정체를 고려하면, 하루를 통째로 잡거나 일찍 출발하는 편이 좋다. 자카르타 시내에서 따만 사파리까지 이동할 때는 보고르역까지 전철을 타고 나머지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것을 추천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택시를 타기에는 너무 멀고, 아무리 택시가 싸다고 해도 부담되는 금액이 나올 수 있다.
따나 아방(Tanah Abang)역에서 찌까랑 라인(Lin Cikarang)을 타고 망가라이역(Stasiun Manggarai)에 도착하여 보고르 라인(Lin Bogor) 열차로 환승했다. 망가라이역은 자카르타 LRT 2단계, 국철 3개 노선, 고속철도(자카르타 ~ 반둥) 등 5개 노선이 교차하는 역으로 자카르타의 최대 환승역이다.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까지는 공항철도로 연결되어 있어서 57분만에 도달할 수 있다.
자카르타 전철의 인구 밀도는 서울 지하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카르타나 서울이나 인구 밀도가 높으니까 지옥철인 건 똑같구나 싶었다. 자카르타 중심부의 망가라이역에서 보고르역(Bogor Station)까지는 1시간 가량이 소요된다.
보고르라는 이름에는 ‘즐거운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보고르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따만 사파리, 보고르 궁전, 보고르 식물원 등이 있다. 보고르는 해발 고도 265m의 고지대에 있어서 날씨는 자카르타보다 조금 서늘하다. 그리고 비가 엄청 많이 오는 것으로 유명한 지역이니 우산을 챙기고 다니는게 좋다.
보고르역에 도착한 뒤에는 그랩으로 오토바이 택시를 잡아서 따만 사파리까지 이동했다. 보고르역에서 따만 사파리 입구까지는 대충 40분 정도가 걸린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따만 사파리의 입구에 도달하면 그랩 택시로는 이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민간 오토바이 택시로 갈아타고 사파리 내부의 입구까지 이동했다. 민간 오토바이 택시는 승객에게 헬멧을 주지 않아서, 뭐랄까 굉장히 일탈하는 기분을 만끽했다.
입구에서 매표소까지 3km 정도를 달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길에는 당근이나 바나나를 파는 상인들이 많이 있었다. 따만 사파리에서는 개인 차량이나 택시로 구경을 하는 것이 가능하고, 덩치 작은 초식동물들에게 자유롭게 먹이를 줄 수 있다. 육식동물이나 잡식동물이 있는 구간에서는 반드시 창문을 닫아야 한다. 사파리 내에서 차량이 아니라 버스로 이동한다면 동물들에게 먹이를 줄 수 없기 때문에 이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날의 공항 이후로 ATM에서 돈을 뽑지 않아 현금이 넉넉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체크카드 사용이 안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사용 가능했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Bus Shelter라고 쓰여진 팻말을 따라가면 된다. 정류장에서 잠시 동안 관광객들을 태우는 버스가 출발하기까지 기다린다. 동남아시아 최대의 야생 사파리 여정을 즐기러 가보자.
따만 사파리의 입장료는 외국인 성인의 경우 400000루피아(한화로 약 33870원)이다. 얼핏 봐도 다른 관광지에 비해 확연히 비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간 사파리 프로그램(Safari Siang)의 운영 시간은 평일 09:00 ~ 17:30, 주말 08:30 ~ 17:00이다.
사파리 투어를 끝내고 나니 어느덧 1시 20분이 되었다. “RIMBA FOOD COURT”라는 푸드 코트로 가서 점심으로 염소 고기 사떼(Sate)를 시켰다. 양고기는 먹어봤어도 염소 고기를 먹는 건 또 처음이었다. 사떼는 양념된 고기를 꼬치에 꽂아 구운 후 먹는 요리이다. 여담이지만 음식점 중에는 “SFC (Safari Fried Chicken)”이라는 귀여운 이름의 패스트푸드점도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오후에 어떤 공연을 보러 갈지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말 미친듯이 비가 내렸다.
비가 그칠 때까지 용과 주스를 마시면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푸드 코트에는 생과일을 즉석에서 갈아주는 가게가 있었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왜 용과인가에 대해 말해보자면.. 필자는 소위 ‘코로나 학번’이라고 불리는 20학번이다. 당시 대학 수업은 대부분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덕분에 통학 시간을 생략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집에서 실컷 놀 수 있었는데, 대학교 1, 2학년 때 “Don’t Starve Together”라는 생존 게임을 친구들과 정말 열심히 했었다(총 900시간 플레이한 고인물이다).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밥솥에 용과 하나랑 나뭇가지 세 개를 넣으면 용과 파이(Dragon Pie)를 만들 수 있다. 용과 파이는 굉장히 좋은 요리라서 게임 속 캐릭터들은 언제나 용과를 열심히 키웠는데, 정작 현실에서의 나는 용과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얘기를 꺼낸 김에 TMI를 좀 더 풀어보자면, Don’t Starve Together의 세계관에는 용과와 더불어 두리안도 존재한다. 밥솥에 괴물 음식(Monster Food)으로 분류되는 재료를 두 개 이상 넣고 조리할 시에는 괴물 라자냐(Monster Lasagna)라는 위험한 음식이 완성되는데, 두리안은 요리 재료로 쓰일 때 괴물 음식으로 취급된다. 그렇다고 해서 단독으로 먹으면 허기는 채워지지만 악취로 인해 정신력이 크게 떨어진다. 두리안을 좋아한다는 설정의 어인 캐릭터 워트(Wurt)를 제외하면 말이다. 뭐 어쨌든 그런 이상한 이유로 인해 두리안과 용과는 항상 먹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날 비가 쏟아졌던 오후 2시부터 3시 30분은 클라리스가 비행기를 타고 인도네시아로 출발했던 시간과 거의 일치했다. 클라리스는 비를 몰고 다니는 걸로 아주 유명하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비가 내렸던 이유에 대해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저 때 내렸던 비는 이번 여행의 〈Last Squall〉이었다.
クララさん、またやってる?🐰
따만 사파리에는 사파리 여정 말고도 여러 가지 볼거리들이 있다. 각종 동물원은 물론이고 다양한 공연이나 워터파크, 놀이공원, 극장, 폭포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돈을 내면 수마트라 코끼리나 낙타를 타는 체험도 가능하다. 조랑말은 25kg의 무게 제한이 있어서 아이들만 탈 수 있다고 한다.
비가 세차게 온 덕에 중간의 공연들을 몇 개 놓치고 말았지만, 4시에 진행되는 카우보이 쇼가 그걸 모두 상쇄할 정도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배우들이 말을 탄 상태로 총을 쏘는 액션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고 중간에 들소 떼를 풀기도 하는 등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이어진다. 건물에 폭발이 일어날 때는 폭발의 열기가 객석까지 전해지며, 인디언이 우물에 빠지는 장면에서는 앞자리에 앉아 있다면 물을 맞게 될 수도 있다. 마치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폭풍을 부르는 석양의 떡잎마을 방범대〉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뛰어나서 여기가 동남아시아인지 미국인지 모를 정도로 생생하게 서부극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비록 언어를 이해할 수는 없었음에도 아주 재미있었다. 따만 사파리를 방문할 예정이라면 카우보이 쇼는 정말 볼만한 가치가 있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따만 사파리에는 판다 궁전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입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구역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하면 중국풍으로 세워진 판다 궁전에 들어서게 된다. 카우보이 쇼가 16시 45분에 끝나서 마감 시간이 임박한 상황이었는데, 운이 좋게도 막차 버스를 타고 방문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두 마리의 자이언트 판다와 네 마리의 레서 판다가 살고 있다. 자이언트 판다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레서 판다를 보러 가지 못했다.
5. 5월 5일 – AFA Indonesia 2024
인도네시아 여행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 클라리스의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AFA 행사 자체는 금토일 3일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필자는 클라리스의 공연이 개최되는 일요일 VIP 티켓을 구매했었다. 추첨을 통해서 사인이 적힌 포스터를 나눠주는 특별한 행사가 3시 45분에 예정되어 있었고, 공연은 저녁 7시부터였다. 그렇지만 일본에 있는 클라리스 팬들에게 현장의 모습을 전하기 위해서 오전 11시에 도착했다.
사람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서 놀랐다.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의 일본 문화 축제라는 소문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넨도로이드나 만화를 비롯해 수많은 공식 부스들은 물론, 100개가 넘는 동인 부스들도 설치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필자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쪽에는 크게 흥미가 없다. 그럼에도 외국에서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연히 〈アンダンテ〉 자체 제작 티셔츠를 입고 계셨던 현지 팬분을 만나서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무언가를 살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Bichi Mao라는 부스의 캐릭터가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얘기를 들어보니 말레이시아인 작가가 연재하는 웹 코믹스의 캐릭터라고 한다. 부스에 계셨던 인도네시아 분께서 한국어를 굉장히 잘하셔서 신기했다. 아마도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분이지 않았을까 싶다.
조금 둘러보던 와중에 잊고 있었던 클라리스 화환의 존재가 생각났다. 이걸 가장 먼저 보러가지 않았다니 세상에! 심지어 입구 바로 앞에 있었음에도 들어올 때 못 봤다는 게 좀 신기했다. 인도네시아에는 클라리스 팬들이 굉장히 많이 계신다. 이렇게 화환까지 제작할 정도라니.. 공연이 끝나고 다시 한번 느낀 거지만 아마 외국 중에서는 클라리스의 인기가 제일 많은 것 같다.
12시쯤 되어서 다른 팬들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점심을 먹었다. 간단하게 Food Street에 있던 요시노야에서 덮밥을 먹고 나니 근처에 클라리스 팬클럽 티셔츠를 입고 계신 분이 보였다. 먼저 말을 걸어서 일본어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원래 만나기로 했던 호주 팬과 인도네시아 팬이 함께 도착했다. 평생 일상생활에서 쓴 적이 없는 영어로 이들과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호주 팬분께서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그러다가 점점 우리 주위에 클라리스 팬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그룹이 형성되었다.
5월 3일에는 VIP 티켓을 구매한 사람들 중에서 추첨을 통해 사인 포스터 선물 이벤트 당첨자가 발표되었다. 모든 VIP에게 기회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추첨을 통해 뽑았다는 게 조금 괘씸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엄청난 물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었다. 클라리스의 사인 포스터 증정회는 15:45 ~ 16:30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전에 팬들끼리 화환 앞에서 모여서 사진을 찍었다. 모두가 함께 하지는 못했으나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러 왔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사인 포스터 증정회에 당첨되지 못했던 ‘진짜 팬’들은 이미 30분 전부터 옆의 빈 공간 앞 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입고 있는 티셔츠나 옷 색깔이나 누가 봐도 클라리스 팬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사인회 부스 옆을 클라라와 카렌이 스태프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클라리스가 옆을 지나가니 모두가 깜짝 놀랐다. 팬들은 손을 흔들면서 가볍게 인사했고, 멤버들도 팬들을 보더니 엄청 기분 좋아하며 공식 SNS를 통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운이 좋았던 사람들은 그렇게 산책을 나오던 클라라와 카렌을 바로 앞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필자는 나중에 푸드 코트로 연결되는 문 앞에서 클라라와 카렌을 한번 더 마주쳐서 팬클럽 부채를 마구 흔들었다.
Set List
1. ひらひら ひらら
2. 恋待かぐや
3. ヒトリゴト
4. irony
5. コイセカイ
6. アンダンテ
7. CLICK
8. ALIVE
9. コネクト
VIP석은 1000석 가량이 있었고 좌석은 미리 전부 정해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날 점심에 처음 만나서 친해지게 된 한 일본인 팬분과 옆자리가 걸렸다. 클라리스의 무대가 펼쳐지는 동안 현장의 열기가 정말 뜨거워서 마치 단독 라이브에 온듯한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다른 가수가 부를 때는 앉아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클라리스의 무대에서는 VIP석의 그 누구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사전에 6곡 정도를 부를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무려 9곡이나 불렀다. 가면을 썼던 시절의 싱가포르 공연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그 어떤 행사에서도 9곡이나 부른 적은 없었다. 단독 라이브가 아닌데도 〈ひらひら ひらら〉나 〈恋待かぐや〉처럼 싱글이 아닌 곡을 불러줬다는 점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둘 다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지만 클라리스의 봄을 대표하는 명곡이다. 중간에 짧은 MC가 있었는데, 멤버들은 일부러 처음에 기모노를 입고 일본풍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다. 일본어로 말하는 것이다 보니까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못 알아들을까봐 카렌이 영어로 “Japanese Kimono”라고 덧붙였다. 그 밖에도 클라라와 카렌은 인도네시아어로 몇 마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무대 양옆에 스크린이 있어서 공연하는 모습을 편하게 볼 수 있었다. 클라라와 카렌이 의상을 갈아입고 〈ヒトリゴト〉의 전주가 흐르자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반응했다. 후렴구 가사에서 “なるよ”와 “くるよ”에 콜이 들어간 게 재밌었다. 다음으로 데뷔곡인 〈irony〉를 불러준 것도 정말 감동이었다. 〈irony〉는 필자의 최애곡이기도 해서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그리고 〈ふぉりら〉와 〈border〉를 예상했지만 의외로 〈コイセカイ〉가 강림했다. 개인적으로 〈コイセカイ〉는 챔버 팝의 정점에 이른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이다. 그저 노래만 좋은게 아니라 안무도 곡이랑 완벽히 어울린다.
〈アンダンテ〉는 당시에 싱글로 발매되기 전이고 디지털 선공개만 된 상태였다. 따지고 보면 일본도 나에게는 외국이긴 하지만 여하튼 외국에서 처음 듣게 되었는데, 여행에 관련된 곡이기도 해서 더욱 깊은 의미가 느껴졌다. 〈アンダンテ〉의 브릿지 부분에는 “Ah 心にかざした望遠鏡に何が見える?”라는 가사가 있다. 이때의 안무가 매우 귀여워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대충 설명하자면 오른쪽 눈 위에 망원경 모양으로 손을 올리고, 몸을 숙인 채로 오른쪽으로 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나서 〈irony〉에 이은 또 하나의 일렉트로 하우스 넘버 〈CLICK〉이 등장했다. 〈irony〉와 〈CLICK〉은 후렴구가 정말 캐치해서 처음 듣는 사람이라도 즐길 수 있는 신나는 노래이다. 다들 어떻게 아는지는 몰라도 후렴구의 “きっと”에서 콜을 넣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사람들은 떼창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이어지는 곡은 〈리코리스 리코일〉로 유명한 〈ALIVE〉였다. 〈ALIVE〉는 재작년에 발매되어 클라리스의 가장 큰 히트곡으로 자리매김했다. 언제나 이 곡은 클라리스의 새로운 시대를 선언했다는 인식이 있기에 정말 고마운 마음 뿐이다. 장담컨대 공연장 속의 그 누구도 〈ALIVE〉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엄청났던 현장의 분위기를 표현할 말을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번에도 다들 어떻게 아는 건지 응원봉을 푸른색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마지막에 점프하는 사람은 못 보긴 했지만.
〈コネクト〉는 무대에서 잠시 퇴장했다가 앙코르 곡으로 불렀다. 역시 아무리 그래도 〈コネクト〉가 빠지면 섭섭하다. 진정한 히트 싱글은 다르다고 느꼈던 게 〈ヒトリゴト〉, 〈irony〉, 〈CLICK〉, 〈ALIVE〉, 〈コネクト〉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일본에서 열리는 단독 라이브에서는 보기 힘든 떼창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고 모두가 단체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다. 확실히 기억나는 건 카렌이 사진을 찍는다고 말할 때 영어로 “Can we take a picture together? Okay! Come on, come on!”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는 감동에 벅찬 상태로 마지막으로 인도네시아 팬분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작별했다. 상대방이 일본어를 특출나게 잘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영어로 대화했다. 학창시절에 나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놓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 공부 동기부여는 방구석에서 백날 하는 것보다 그냥 한번 해외를 나가보면 알게 된다.
끝나고 다들 바깥에 모여 있던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 이들 중 팬클럽에 가입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니 일본 주소나 전화번호가 없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클라리스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팬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먼저 인사해주시는 현지 팬분들이 많아서 감사했다. 필자를 포함한 몇 명은 택시를 타고 맥도날드에 잠깐 들려 간단한 뒷풀이를 가지기도 했다.
6. 5월 6일 – 그랜드 인도네시아 몰
마지막 날에는 산책한다는 느낌으로 편안하게 돌아다녔다. 체크아웃을 하고 저녁까지만 짐을 맡겨도 되냐고 호텔에 부탁했는데, 감사하게도 호텔 측에서 흔쾌히 요청을 들어주셨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그랩 오토바이를 타고서 인도네시아의 인사동이라고 불리는 잘란 수라바야(Jl. Surabaya)로 이동했다. 잘란 수라바야는 골동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이다. 정말 관광객이 한 명도 없었는데, 코로나 이후로 예전에 비해 상권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잘란 수라바야에서 조금만 왼쪽으로 걸으면 수로파티 공원(Suropati Park)을 만나게 된다. 이 공원은 자카르타 현지인들의 소중한 휴식 공간이라고 한다.
수로파티 공원에서 조금만 왼쪽으로 걸어가면 그랜드 인도네시아 몰(Grand Indonesia Mall)이 나온다. 여행의 마지막 날에 구경하기 위해서 일부러 아껴두었다. 그랜드 인도네시아 몰이라는 이름답게 규모가 아주 커서 서쪽 몰(West Mall)과 동쪽 몰(East Mall)로 나뉘어져 있고, 두 건물은 다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것이 가능하다.
그랜드 인도네시아 몰을 구경하다가 〈ふぉりら〉의 MV에 등장한 해골 가면을 파는 가게 “Flying Tiger Copenhagen”이 보여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Flying Tiger Copenhagen은 덴마크의 다이소라고 불리는 저가형 생활용품 기업이다. 필자는 작년 10월 〈ふぉりら〉의 MV가 공개된 다음 날, 청량리역의 신세계 백화점에 있는 Flying Tiger Copenhagen에 가서 해골 가면을 손에 넣었었다. 지금은 할로윈 기간이 아니라 저 가면을 팔고 있지는 않았다.
어느 나라를 가나 마트 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이다. 그랜드 인도네시아에 있던 마트에는 한국 과자나 라면이 제법 비치되어 있어서 신기했다. 신라면, 너구리, 짜파게티, 안성탕면, 불닭볶음면, 양파링, 콘칲, 바나나킥 등등.. 페트병 콜라 하나가 6000루피아(한화로 약 510원)에 불과하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랜드 인도네시아 몰 앞에는 분다란 하이(Bundaran HI)라는 환영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분수 중앙에 있으며 30m나 되는 높이의 받침대 위에 세워진 청동상 분다란 하이는 자카르타 도심의 대표적인 상징물 중 하나이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1962년 아시안게임 개최를 기념하며 환영의 의미를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환영한다는 뜻의 슬라맛 다탕 기념비(Selamat Datang Monument)라고도 불린다. 덧붙여 매주 일요일 오전 6시에서 11시 사이는 이 주변 도로에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차 없는 날’이다. 필자는 살짝 타이밍을 놓쳤더니 방문했을 때 차가 매우 많이 다니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먹을 마지막 식사로는 현지 팬분이 추천해주신 나시 파당(Nasi Padang)을 계획하고 있었다. 나시 파당이란 매운 고기, 생선, 야채, 삼발(Sambal) 등을 흰 쌀밥과 함께 먹는 서수마트라의 전통 음식이다. 조리되어 있는 다양한 요리들을 각각의 접시에 담아서 내놓으면,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메뉴를 골라서 자유롭게 밥과 같이 먹으면 된다. 건드리지 않은 접시는 계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근처에 리뷰가 좋은 로컬 맛집이 있어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시 파당을 먹을 때는 보통 손을 사용하기 때문에 야외 식당에도 세면대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확실히 이런 로컬 식당은 유명 관광지나 쇼핑몰의 식당에 비해서 가격이 착했다. 양이 생각보다 많았는데도 90000루피아(한화로 약 7640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16시 30분 정도가 되었을 때쯤, 슬슬 클라라가 먹었다고 추정되는 인도네시아 과자 “Astor Matcha”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stor은 인도네시아에서 대중적인 웨이퍼 스틱형 과자라고 한다. 디스코드를 통해 인도네시아 팬들에게 이 과자에 대해 물어보니 편의점에서 판다고 하길래 굉장히 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녹차 맛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편의점에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Astor만이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열심히 클라라와 카렌을 응원하고 계신 팬분들을 위해서라도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2시간 동안 땡볕에서 열심히 편의점을 돌아다닌 천신만고 끝에, 최종적으로는 Astor Matcha를 7개나 획득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편의점은 인도마렛(Indomaret)이나 알파마트(Alfamart)다. 인도마렛은 전국에 약 22000점, 알파마트는 약 18000점 정도가 있다고 하는데, 한국으로 치면 GS25와 CU의 포지션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익숙한 이름의 다국적 프랜차이즈 매장은 자카르타에도 아주 흔했다. 특히 피자헛, 버거킹, KFC가 많이 보였다. 그리고 HokBen이라는 일본계 도시락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 엄청 많았다.
인천행 비행기의 이륙 시간은 22시 50분이었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교통체증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조금 일찍 출발했다. 호텔에 들러 짐을 챙기고 나서 18시 30분 정도에 택시에 탑승했다. 공항에서 출발하는 택시는 추가 요금이 생겼지만, 반대로 공항으로 돌아가는 택시의 경우엔 상관이 없었다.
공항에서는 클라라와 카렌을 우연히 보는 행운을 경험하기도 했다. 행선지가 각각 인천과 나리타로 비슷하다보니 터미널이 같았고, 돌아가는 시간이 운명적으로 완벽하게 일치했다. 간단한 인사 정도는 해도 괜찮았을 테지만, 멤버들의 사적인 시간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말은 걸지 않았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조금 말하자면 클라라는 분홍색 옷, 카렌은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침 귀국하면 곧 누나의 생일이라 선물을 사기 위해 면세점을 조금 둘러봤다. 개인적으로 누구에게든 선물을 할 때 이왕이면 먹을 것을 주려고 한다. 물건은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점점 그 존재감이 옅어지지만, 음식은 물리적으로는 사라지더라도 오감에 각인되어 잊을 수 없는 특별함으로 남곤 한다. 그러던 와중 트러플 감자칩이 눈에 확 들어왔다. 0 하나가 더 붙은 줄 모르고 사버렸는데, 아무리 선물이라고 해도 150000루피아(한화로 약 12760원)짜리 과자를 산 건 아마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하나만 사기엔 아쉬워서 두리안 사탕 묶음도 같이 샀다.
여행의 마지막 순간까지 향신료를 더해주는 클라라와 카렌. 5월 6일의 22시에는 “ClariS Iris Radio #4″가 예정되어 있었다. 클라리스는 2019년에 발매한 미니 앨범 《SUMMER TRACKS -夏のうた-》의 발매와 동반되었던 “ClariS Summer Delay Radio”를 시작으로, 새로운 싱글이나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유튜브를 통해 팬들의 사연을 읽어주거나 자신들의 음반을 소개하는 라디오를 진행해오고 있다.
《Iris》는 클라리스의 7번째 정규 앨범이다. “Iris”는 라틴어로 무지개라는 뜻인데, 멤버들에 의하면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노래들을 모은 앨범이 하나의 무지개처럼 된다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조금 있어 보이게 표현하면 《Iris》는 클라리스의 화이트 앨범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앨범 커버도 흰색에 가깝게 그려져 있기도 하고.
7. 5월 7일 – 한국으로 돌아오다
인도네시아 여행을 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학기 중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가길 정말 잘했다. 원래라면 접할 기회조차 없었던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었다. 일본과는 다르게 아예 이곳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영어에 의존해 대화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자카르타에서 보낸 일주일은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영원히 값진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내 안에서의 경험도 그렇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알게 된 인연도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사용하는 언어나 살아온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르더라도 해외에서 비슷한 취향이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해외의 공연장에서 팬들끼리 서로 찾아다니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감정이 생겨난다. 역시 학점 따위에 신경 쓰면서 지루한 삶을 사는 것보다는 이렇게 사는 편이 훨씬 더 행복하고 나 자신과도 잘 어울린다.